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처음 디즈니플러스에서 <최악의 악> 포스터를 봤을 때, 큰 기대 안 했습니다. "아, 또 조폭 이야기야? 또 언더커버?" 한국 영화판에서 <신세계> 이후로 수없이 쏟아져 나온 그 뻔한 클리셰 범벅일 거라고 지레짐작했거든요. 깡패 소굴에 잠입한 경찰, 의심과 배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브로맨스. 뭐 우리가 밥 먹듯이 봐온,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림이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1화를 켜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마지막 회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라고요. 담배도 안 피우는데 괜히 입맛이 쓴 게, 소주 한 잔이 절실해지는 기분이랄까요. 그만큼 이 드라마가 주는 여운과 씁쓸함, 그리고 지독한 '매운맛'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단언컨대, <최악의 악>은 <신세계> 이후 한국 느와르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끝점'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단순히 때려 부수고 배신하는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 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든요. 오늘은 이 드라마가 왜 '역대급'인지, 왜 제가 밤새워 정주행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이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풀어보려 합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하세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뻔한 맛인 줄 알았는데, 독이 든 성배였다
언더커버물의 핵심은 보통 '정체성 혼란'입니다. 경찰인 내가 깡패인 척하다가 진짜 깡패가 되어가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말이죠. 영화 <신세계>의 이자성(이정재)이 살기 위해 깡패가 되었다면, <최악의 악>의 박준모(지창욱)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성공'과 '열등감' 때문에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갑니다.
초반부 준모는 시골 형사라는 자격지심, 그리고 엘리트 경찰 가문인 처가에 대한 묘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가 강남연합의 보스 정기철(위하준)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정의구현이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신분 상승의 욕구'가 깔려 있죠. 이게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드는 첫 번째 지점입니다. 주인공이 마냥 정의롭지 않아요. 아주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 위태롭습니다.
드라마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준모가 '권승호'라는 가짜 신분에 잡아먹히는 과정을 소름 끼치게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던 그가, 나중에는 목적을 위해 살인마저 방조하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에 무감각해집니다. 특히 피 범벅이 된 채 거울을 보는 지창욱의 눈빛이 변해가는 과정은 가히 압권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 경계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2.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삼각관계
이 드라마가 '최악'인 이유는 폭력성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의 잔인함 때문입니다. 준모의 아내이자 경찰인 유의정(임세미)이 작전에 투입되면서, 이 드라마는 단순한 범죄물을 넘어 지독한 치정극으로 변모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남편은 깡패 조직에 잠입해 있고, 그 조직의 보스는 내 아내의 첫사랑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보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아내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작가님이 정말 작정하고 시청자들 멘탈을 흔들려고 쓴 설정이 분명합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이 셋 중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악당인 정기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의정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자신을 형처럼 따르는 승호(준모)를 끝까지 믿었습니다. 악당이 가장 순수하고, 그를 잡으려는 경찰 부부가 그 순수함을 이용해 뒤통수를 치는 구조. 보면서 "와, 진짜 경찰들이 더 나쁜 놈들 아니야?"라는 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오게 만듭니다.
특히 정기철이 의정과 승호 앞에서 해맑게 웃을 때마다 느껴지는 그 불편함과 죄책감은 온전히 시청자의 몫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위하준 배우가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서툰 소년 같은 연기가 이 비극을 더 극대화했습니다. 그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무너지는 표정은... 정말이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3. 스타일리시한 90년대 강남, 그리고 액션
스토리만 좋은 게 아닙니다. <최악의 악>은 '보는 맛'이 확실한 드라마입니다. 배경이 되는 1990년대 강남의 유흥가를 재현한 미장센은 촌스럽지 않고 힙합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밤거리, 좁은 복도에서 벌어지는 날것 그대로의 액션, 그리고 인물들의 패션까지. 디즈니플러스가 돈 좀 썼구나 싶더라고요.
특히 복도 액션씬은 한국 느와르 역사에 남을 명장면입니다. 정교하게 합을 맞춘 무술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개싸움'에 가깝습니다. 칼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 둔탁한 타격음,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감. 감독은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그 고통과 처절함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준모가 이 과정에서 짐승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죠.
4. 결말 해석: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이제 대망의 결말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스포일러입니다.) 결국 조직은 와해되고, 정기철은 죽습니다. 그것도 준모의 손에 의해서요. 준모는 경찰로서 임무를 완수했고, 특진도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이자 '권선징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텅 빈 거실, 준모와 의정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 그리고 기철의 묘소를 찾아가 자신의 결혼 반지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우는 준모의 모습. 이 엔딩이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준모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작전 중에 자신의 도덕성을 잃었고, 아내와의 신뢰를 잃었으며,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줬던 '형제' 같은 친구(기철)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가 기철의 무덤에 결혼 반지를 두고 온 것은, 이제 예전의 '박준모'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의정과의 관계도 예전 같을 수 없겠죠. 두 사람 사이에는 기철이라는 거대한 죄책감이 평생 유령처럼 떠돌 테니까요.
제목이 왜 <최악의 악>일까요? 처음엔 깡패들이 최악의 악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뀝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고, 사람의 진심을 짓밟고 이용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망가져버린 인간성. 그것이야말로 진짜 '최악의 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며: 느와르를 사랑한다면 필청
<최악의 악>은 근래 본 OTT 오리지널 시리즈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지창욱의 재발견, 위하준의 매력, 임세미의 절제된 연기까지 배우들의 구멍 없는 연기력이 12부작을 순식간에 삭제시킵니다.
단순히 킬링타임용 액션물을 찾으신다면 조금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깊이 있는 드라마, 보고 나서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여운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인생 드라마가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번 주말, 90년대 강남의 그 눅눅하고 비릿한 세계로 한번 빠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물론, 다 보고 나서 찾아오는 허무함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 본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며, 디즈니플러스 <최악의 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사진 출처: 디즈니플러스 공식 스틸컷 및 예고편 캡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