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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5년 만에 다시 본 <이태원 클라쓰>, 그때는 몰랐던 '어른의 책임감'에 대하여

by sesanglog 2026. 1. 2.

이태원 클라쓰

 

어제 퇴근길은 유독 더 춥더라고요.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 진짜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 말이죠. 집에 오자마자 옷도 안 벗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도저히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날 있잖아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멍하니 넷플릭스만 넘기다가 멈춘 곳이 바로 <이태원 클라쓰>였습니다.

벌써 이 드라마가 나온 지 5년이 넘었네요. 처음 나왔을 때요? 그때는 그냥 박새로이 밤톨 머리가 웃겼고,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같은 대사가 중2병 같다고 생각한 적도 솔직히 있었어요. 성공한 웹툰 원작이니까 그냥 시원한 복수극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인생이 신기하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생활하면서 쓴맛 단맛(사실 쓴맛이 90%지만) 다 보고 나서 다시 본 이 드라마는, 예전이랑은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더라고요.

 

1. 무릎 한 번 꿇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근데 그게 전부더라

드라마 초반에 새로이가 장근원 때리고 장대희 회장 앞에 서는 장면, 다들 기억하시죠? 장 회장이 "무릎 꿇고 사과하면 퇴학은 면해주겠다"고 하는데, 새로이는 끝까지 안 꿇잖아요. 예전엔 그걸 보면서 "와, 진짜 고집 세다. 저러다 인생 꼬이면 어쩌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는 제가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새로이야, 그냥 한 번만 굽히지 그랬냐"가 아니라, "저 무릎을 안 꿇기 위해 저 녀석은 인생 전체를 걸었구나" 하는 게 보여서요.

솔직히 우리, 사회생활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 꿇고 살잖아요. 진짜 물리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닿게 하지는 않아도, 내 자존심 깎아 먹으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라는 말을 영혼 없이 내뱉죠. 내 잘못도 아닌데 거래처 때문에, 혹은 상사 기분 때문에 내 소신 같은 건 쓰레기통에 처박아두는 게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새로이는 그걸 거부한 거예요. 그 무릎 한 번 안 꿇은 대가로 퇴학당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감옥까지 갑니다. 근데도 얘는 눈빛 하나 안 변하더라고요. 그때 새로이가 했던 말이 가슴을 뼈 때리게 후벼 팠습니다. "소신, 원칙... 그건 누구나 다 말하지만, 지키는 건 어렵다"는 식의 이야기였죠.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는데, 목구멍이 다 따끔거리더군요. 나는 과연 내 소신을 위해 뭘 걸어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요.

 

2. "술맛이 어떠냐?"라는 질문에 담긴 인생의 무게

"술맛이 어떠냐?"
"답니다."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새로이 아버지가 아들한테 소주 따져주면서 술맛을 묻는 이 장면. 예전엔 그냥 '캬, 명대사네' 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엔 진짜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요즘 제가 마시는 술은 맨날 써요. 인생이 달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근데 박새로이는 그 모진 풍파를 다 겪고, 원수 같은 장가 놈들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도 결국은 그 술맛을 달게 만들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 드라마가 단순히 '성공기'가 아니라 '어른의 성장기'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아요.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술맛이 쓰다고 세상 탓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쓴맛을 달게 만들기 위해 내일 또 가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는 거더라고요. 새로이가 원양어선 타고, 공장 돌면서 7년 동안 돈 모으는 과정을 짧게 보여주지만, 저는 그 7년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지 이제야 조금 보입니다.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복수'라는 이름의 원동력으로 버텨낸 그 끈기가... 단순히 멋있는 게 아니라 무서웠습니다. 그건 '책임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3.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의 무서움

단밤 식구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전과자, 트랜스젠더, 소시오패스... 어딘가 하나씩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새로이는 끝까지 그들을 책임집니다. 장가에서 마현이(이주영 분)가 트랜스젠더인 걸 폭로했을 때, 새로이가 도망치려는 현이한테 말하죠. "너는 너야. 네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 없어."

와... 진짜 이 대사에서 통곡할 뻔했습니다. 우리 회사 생활 하다 보면,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팀원들이 눈치 주고, 상사가 "너 원래 이 모양이냐"라고 인격 모독할 때 많잖아요. 내가 나인 게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새로이 같은 리더가 곁에서 "괜찮다, 너는 너니까 당당해라"라고 말해준다면... 그건 진짜 구원이겠더라고요.

그런데 말이죠, 다시 보니 새로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무식할 정도의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이서가 현이를 자르라고 할 때도, 새로이는 현이에게 월급의 두 배를 주면서 "이 돈 값어치만큼 더 노력해라"라고 말합니다. 이건 믿음이라기보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어른의 자세였던 거죠. 저는 그 대목에서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나는 내 밑의 후배나 동료가 실수했을 때, 새로이처럼 "내가 책임질게, 너는 더 해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위부터 챙기는 비겁한 어른인가?

 

4. 장대희 회장,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봐야 할 거울

유재명 배우가 연기한 장대희 회장... 진짜 다시 봐도 압권이더라고요. 예전엔 그냥 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다르게 보였습니다. 장 회장도 사실 처음엔 새로이 같은 열정이 있었겠죠. 무(無)에서 장가를 일궈낸 인물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책임'이 아니라 '권위'를 선택했습니다.

장 회장이 새로이한테 집착하는 이유도 사실은 공포였을 거예요. 자기가 잃어버린 그 '소신'과 '청춘'을 새로이가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꺾어버리지 않으면 자기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겠죠. "짖는 개는 필요 없다, 무릎 꿇어라"라고 소리치던 장 회장의 모습에서, 저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어른들을 봤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권력 뒤에 숨는 순간 그냥 '늙은 괴물'이 된다는 걸요.

마지막에 장 회장이 새로이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릴 때, 예전엔 "쌤통이다!" 했지만 지금은 그냥 허망했습니다. 저렇게 비굴해질 것을 왜 그렇게 평생을 남을 짓밟으며 살았을까 싶어서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장대희처럼 늙지는 말자. 돈 좀 없어도, 남 앞에서 비굴해질지언정 내 영혼까지 팔아먹지는 말자"라고요.

 

5. 마치며: 당신의 밤은 여전히 쓴요?

드라마 마지막 화에서 새로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는 결국 "네가 네 삶의 주인이냐?"라고 묻는 드라마더라고요. 세상이 정해준 가치,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잣대 말고, 네가 진짜 지키고 싶은 게 뭐냐고 말이죠.

글이 좀 길어졌네요. 그냥 드라마 리뷰 하나 쓰려던 게, 제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일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 <이태원 클라쓰>가 주는 힘인 것 같아요. 사람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힘.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밤은 어떤가요? 여전히 소주 맛이 쓰고,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우신가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박새로이를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5년 전엔 몰랐던, 어른으로서의 뜨거운 책임감이 여러분의 차가운 가슴을 조금은 데워줄지도 모르니까요.

저도 이제 맥주 캔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려 합니다. 내일 아침엔 지하철에서 좀 덜 힘들 것 같아요. 새로이도 버텼는데, 나라고 못 버틸까 싶어서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술맛이 달게 느껴지는 그런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