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세상이 참 무섭게 빠르죠? OTT 창을 켜면 자극적인 썸네일들이 넘쳐나고, 누가 누구를 더 잔인하게 복수하는지 경쟁하는 것 같은 작품들 사이에서 마음이 좀 지치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 본 옛날 일기장처럼 생각난 드라마가 하나 있었어요. 2011년이었나요? 벌써 14년이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여전히 제 기억 속에는 노란 유채꽃밭 같은 따스함으로 남아있는 드라마, 바로 MBC의 <내 마음이 들리니>입니다.
며칠 전부터 퇴근길에 조금씩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와... 이게 참 묘하더군요. 그 시절 20대의 제가 느꼈던 감정이랑,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의 제가 느끼는 감정이 너무 달라서요. 처음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 사람들은 '착한 드라마'라고 불렀죠. 하지만 다시 보니 이 드라마, 사실 소재만 놓고 보면 웬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더 지독해요. 재벌가의 암투, 사고로 인한 장애, 엇갈린 출생의 비밀... 그런데 신기한 건, 이 지독한 재료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따뜻한 위로의 요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에요. 그게 바로 이 드라마가 가진 진짜 마법 같은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먼저 제 마음을 건드린 건 역시 '봉우리'라는 캐릭터였어요. 황정음 배우가 연기했는데, 사실 당시엔 '지붕 뚫고 하이킥'의 발랄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여기서의 황정음은 그냥 봉우리 그 자체였습니다. 억척스럽게 살아가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고, 슬픔을 웃음으로 꾹꾹 눌러 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고 예쁘던지. 특히 7살 지능을 가진 아빠 봉영규(정보석 배우)와의 호흡은 다시 봐도 눈물 버튼이에요.
정보석 배우님의 연기는 정말... '신들렸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죠. 그전까지 자이언트에서 조필연 같은 극악무도한 악역을 하시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맑고 투명한 눈을 가진 영규가 되셨을까요? "우리야~"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 하나에 담긴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풍파에 찌든 제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세상 그 어떤 부녀보다 진하게 연결된 두 사람을 보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혈연이 아니라, 서로의 빈틈을 기꺼이 채워주려는 마음이 진짜 가족을 만드는 거겠죠.
그리고 이 드라마의 핵심 설정인 차동주(김재원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청각장애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재벌가 후계자. '살인미소'라는 별명답게 환하게 웃고 있지만, 사실 그 웃음 뒤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포와 싸우는 고독함이 깔려 있어요. 김재원 배우가 눈으로 소리를 읽는 그 미묘한 시선 처리나 긴장감을 정말 섬세하게 표현했더라고요. "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제목처럼, 그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진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서정적으로 그려져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릿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다시 보면서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찌른 건 의외로 '봉마루', 그러니까 장준하(남궁민 배우)였습니다. 남궁민 배우의 리즈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서늘하면서도 애절한 분위기가 압권이에요. 가난하고 모자란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새롭게 얻은 가족 안에서도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방인의 슬픔. 그는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특히 동주를 향한 그 애증 섞인 형제애는 참...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을 줘요. 마루가 비를 맞으며 울던 장면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괴로워하던 모습들은 지금 봐도 연출이 참 세련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궁민이라는 배우가 왜 지금의 대배우가 되었는지, 그 싹을 여기서 확실히 볼 수 있죠.
연출적인 면에서도 할 말이 참 많아요. 이 드라마는 유독 색감이 예쁩니다. 노란 유채꽃, 하얀 피아노, 그리고 인물들의 맑은 표정들까지. 자극적인 연출보다는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천천히 호흡하는 카메라는 시청자로 하여금 극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죠. 대사 하나하나도 시(詩) 같아요. "소리는 보이고, 마음은 들린다"는 이 역설적인 문장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며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요즘 드라마들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시청자를 정신없게 만들지만, <내 마음이 들리니>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을 것인지를 더 고민하거든요.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정주행을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져요. 마치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청량함이랄까요? 악역들조차도 그 내면의 상처가 너무나 명확히 보여서 미워하기보다는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작가님(문희정 작가)의 무서운 능력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다시 그 시절 그 감성으로 푹 빠져버렸네요. (아,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넷플릭스나 티빙에서 꼭 한 번 찾아보셨으면 좋겠어요.) 14년 전 드라마라고 해서 촌스러울 거란 편견은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 즉 사랑, 용서, 이해라는 가치는 유행을 타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지금처럼 소통이 단절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을 보고 진심을 읽어내려는 노력. <내 마음이 들리니>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 마음의 귀를 여는 방법이었을 거예요. 이번 주말, 딱히 볼 만한 최신작이 없다면 혹은 마음에 쉼표가 필요하다면, 봉우리와 차동주의 따뜻한 세상으로 한 번 걸어 들어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는 아마 오늘 밤에도 남은 에피소드를 마저 보며 눈물 콧물 좀 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