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새벽이었어요. 유난히 잠은 안 오고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결국 또 이 드라마를 틀고 말았습니다. 2019년에 방영되었을 때 본방 사수를 하며 수건 한 장을 다 적셨던 기억이 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그 울림은 전혀 작아지지 않더라고요. 아니, 오히려 제가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그런지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표정 하나, 대사 한 마디가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습니다.
오늘 제가 각 잡고 소개해 드릴 작품은 제 인생 드라마 부동의 1위, '눈이 부시게'입니다. 혹시 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내용을 다 알고 봐도 그 깊이가 남다른 작품이라 감히 끝까지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왜 우리가 이 퍽퍽한 세상을 '눈부시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1. 어느 날 갑자기 늙어버린다면? 이 발칙하고도 서글픈 상상에 대하여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아, 시간을 딱 5분만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말이에요. 중요한 시험에서 실수를 했거나, 술김에 전 남친에게 메시지를 보냈거나(웃음),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모진 말을 내뱉고 돌아선 밤 같은 때요.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바로 이런 인간의 아주 보편적이고도 간절한 욕망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인공 혜자(한지민 분)는 아나운서를 꿈꾸는 25살의 평범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죠. 그러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신비한 시계를 줍게 됩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이 시계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릅니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쓴 만큼, 혜자의 육체는 남들보다 빠르게 늙어버리는 것이죠.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고를 막기 위해 수천 번 시계를 돌린 결과, 혜자는 하루아침에 70대 할머니(김혜자 분)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첫 번째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젊음'이라는 게 사실은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고 있지만, 사실은 매 순간 우리의 수명을 깎아가며 맞바꾸고 있는 아주 귀한 한정판 선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직관적으로 보여주었거든요. 쭈글쭈글해진 손등과 굽어버린 허리를 보며 오열하는 혜자의 모습은, 단순히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상실'에 대한 깊은 공포를 자극했습니다.
2. 70대 할머니의 몸에 갇힌 25살 청춘, 그 괴리감이 주는 먹먹함
이 드라마가 진짜 대단한 건, 단순히 '노인 분장'을 한 여배우의 연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겉모습은 70대 할머니인데 마음은 여전히 아나운서를 꿈꾸고, 잘생긴 준하(남주혁 분)를 보며 가슴 설레하는 혜자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만듭니다. 친구들은 여전히 예쁜 옷을 입고 클럽에 가고 맛집을 다니는데, 혼자만 경로당에 가야 하고 뼈마디가 쑤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혜자의 처지는 사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겪게 될 필연적인 미래이기도 하니까요.
특히 준하와의 관계가 참 가슴 아팠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이제 막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할머니와 청년으로 마주 서야 하는 그 비극적인 상황. 준하는 혜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혜자는 준하의 곁을 맴돌며 그가 겪는 고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남주혁 배우의 연기가 정말 압권이었죠.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진 듯한 그 공허한 눈빛이 혜자의 슬픔과 맞닿을 때, 시청자인 저도 화면 너머로 같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늙은 게 아니라, 낡아진 것 같다"는 식의 대사들은 단순히 극 중 대사가 아니라 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돌직구 같았습니다.
3. 대한민국 드라마사를 뒤흔든 10회 엔딩, 그 거대한 반전의 파도
자, 이제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이야기를 빼놓고는 이 드라마의 진가를 논할 수 없습니다. 10회 엔딩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경악을 하게 됩니다. 혜자가 시계를 돌려 늙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 사실은 혜자가 알츠하이머(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였다는 그 충격적인 반전 말이에요.
저 정말 그때 소름이 돋아서 팔을 한참이나 문질렀던 기억이 나요. 우리가 지금까지 판타지라고 믿었던 모든 장면이 사실은 기억을 잃어가는 한 노인의 머릿속에서 뒤섞인 조각들이었다니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기억, 남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마음이 섞여 만들어낸 슬픈 환상이었던 겁니다. 제작진이 깔아놓은 복선들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더군요. 왜 아빠를 볼 때 그렇게 슬프게 울었는지, 왜 엄마에게 미안해했는지... 그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 드라마는 단순한 판타지에서 '인간의 삶과 기억'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장르를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이건 단순히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라, 치매 환자의 시선을 이토록 따뜻하고도 처절하게 그려낸 최고의 연출이었습니다.
4. "내 아들은 눈길에서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어요."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혜자가 아들의 다리를 걱정하며 눈을 치우던 장면을 꼽겠습니다. 평생을 무뚝뚝하고 차갑게 대했던 아들(안내상 분)에게,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혜자는 쓸고 또 씁니다. 혹시라도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미끄러질까 봐, 새벽부터 나와 아무도 모르게 눈을 치우던 엄마의 마음. "아들이요, 다리가 불편해서 눈이 오면 잘 넘어져요." 이 대사를 읊조리는 김혜자 선생님의 표정은 정말... 이건 연기가 아니라 그냥 '엄마' 그 자체였습니다.
아들은 그제야 깨닫죠. 평생 자신을 차갑게 대했던 엄마가 사실은 뒤에서 가장 뜨겁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종종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때로는 그 방식이 투박해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는 그 투박함 속에 숨겨진 숭고한 희생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래서 더 아프게 그려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장면의 빗자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해지네요.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대목입니다.
5.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마지막 나레이션의 힘)
드라마의 마지막 회, 김혜자 배우의 나레이션은 이 드라마의 화룡점정입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취업 준비에 지친 청년들에게, 육아에 지친 부모들에게,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 선 노인들에게 공평하게 건네는 위로입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망치지 말라는 그 당부 말이죠.
사실 우리 인생이 매일매일 축제 같을 수는 없잖아요.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구차하고, 때로는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훨씬 많죠. 하지만 혜자는 말합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고요. 대단치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요. 저는 이 나레이션을 메모장에 적어두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꺼내 봅니다. 오늘 내가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퇴근길에 마주친 길고양이 한 마리까지도 사실은 다 '눈부신' 순간들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6. 마치며: 당신의 눈부신 오늘을 응원하며
블로그를 운영하며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이나 사실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아 답답하고, 내가 하는 노력이 의미가 있나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드라마 속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는 단순한 드라마 이상의 경험이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이토록 따뜻하게 가르쳐준 선생님 같은 작품이죠.
마지막으로 혜자의 대사를 다시 한번 빌려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