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금 막 마지막 회를 끄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웠습니다. 아, 진짜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가슴 한가운데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뜨거운 걸 삼켜서 식도가 다 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전 드라마를 그렇게 막 찾아보고 열광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남들 다 본다는 '오징어 게임'이나 '더 글로리' 같은 작품들도 한참 뒤에야 띄엄띄엄 봤을 정도로 유행에 참 무디고 뒤처지는 사람인데,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은중과 상연>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이상하게 포스터 속 두 배우의 눈빛이 저를 계속 불러 세우는 기분이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텅 비어서 휴대폰 연락처를 위아래로 한참이나 의미 없이 스크롤 하는 날.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 채 손가락만 바삐 움직이는 그런 이상한 밤 말이죠. 어제가 딱 그런 밤이었습니다. 혼자 맥주 한 캔 따놓고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거기서 제 10대와 20대, 그리고 지금의 조금은 초라해진 제 모습까지 통째로 다 만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잊고 지냈던 일기장을 누군가 강제로 읽어주는 기분이었달까요.
1.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던 그 시절의 우리
드라마 속 은중(김고은)이랑 상연(박지현)이를 보면서 저는 자꾸만 제 고등학교 시절 가장 소중했던 단짝 친구, '민주(가명)'가 생각나서 가슴이 미지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껌딱지처럼 딱 붙어 다녔거든요. 학교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 떡볶이 먹으러 달려가고, 시험 기간엔 공부하겠답시고 도서관에 가서 정작 한 시간 공부하고 세 시간 내내 수다만 떨다 오고... 그때는 정말 민주가 제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아요. 걔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걔가 어디서 누구한테 무시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가 더 잠을 못 자고 씩씩거렸으니까요.
근데 참 희한하죠.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던 사이였고,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는데, 왜 우리는 지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을까. 드라마 속 은중과 상연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거기엔 아주 지독한 열등감, 뾰족한 질투, 그리고 "너는 왜 나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라는 어린아이 같은 원망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김고은 배우의 그 특유의 덤덤하면서도 금방이라도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표정을 보는데, 예전에 제가 민주한테 느꼈던 그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맞아, 나도 저런 일그러진 표정으로 걔를 본 적이 있었지." 하면서 자꾸만 과거의 저와 대면하게 되더라고요.
2. '우정'이라는 예쁜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끈적한 감정들
보통 우정이라고 하면 우린 되게 아름답고 숭고한 것만 생각하잖아요?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근데 진짜 현실적인 우정,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맺어진 여자들의 우정은 그렇게 단면적이지 않거든요.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거의 '유사 연애'에 가깝습니다. 아니, 어쩌면 연애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질척거려요. 연인은 헤어지면 남이 되고 기억에서 지우면 끝이지만, 친구는 내 인생의 배경화면처럼 구석구석 깔려 있어서 도망칠 곳도 없거든요. 내가 가는 단골 카페, 우리가 자주 듣던 노래, 심지어 내 말투 속에까지 걔가 묻어 있으니까요.
상연이가 화려하게 잘 나갈 때 은중이가 느끼는 그 미묘한 박탈감... 이거 진짜 사람이라면,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거 아닐까요? 겉으로는 "와, 진짜 축하해! 넌 역시 잘될 줄 알았어!"라고 입술만 달싹이며 말하지만, 차오르는 속마음은 '왜 하필 쟤만? 왜 나는 여전히 여기 제자리걸음이지?' 하는 아주 못나고 찌질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 말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가 그런 인간의 밑바닥 감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어쩌면 조금 잔인할 정도로 투명하게 보여줘서 좋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괴로웠습니다. 박지현 배우가 연기한 상연이는 겉보기엔 모든 걸 가진 것 같지만 속은 결핍으로 텅 비어 있었고, 김고은 배우의 은중이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죠. 이 두 에너지가 부딪힐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계속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민주가 저보다 먼저 좋은 직장에 취업했을 때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지 못했어요.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질투라는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죠. 그때의 제 옹졸함이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아, 나만 이렇게 못된 게 아니었구나" 하는 비겁한 안도감과 "나 진짜 그때 참 못난 년이었네" 하는 자책감이 동시에 밀려오는데, 정말 마시고 있던 맥주 맛이 인생보다 쓰게 느껴지더라고요.
3. 왜 우리는 서로에게 그토록 잔인했을까
드라마 중반부에 둘의 감정이 극도로 치달으며 크게 터지는 장면이 있잖아요. 서로가 가장 아껴왔던 만큼, 서로의 급소를 가장 정확히 찌르는 말들을 비수처럼 내뱉는 그 장면. 저는 거기서 숨이 막혀 일시 정지를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소름 끼치게 제 경험이랑 겹쳐서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내가 어디를 찔려야 가장 아픈지, 내 열등감이 어디에 뿌리 박혀 있는지 너무 잘 알잖아요. 그래서 싸울 때 그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는 거죠. 남은 모르는 내 치부를 걔는 알고 있으니까요.
은중이가 상연이에게 내뱉는 가시 돋친 말들, 그리고 상연이가 은중이를 밀어내며 짓던 그 차가운 표정들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왜 서로를 그토록 아껴주면서도 동시에 파괴하고 싶어 할까?' 아마 그건 상대방이 곧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일 거예요. 걔가 잘되는 게 마치 내가 잘되는 것 같아 기쁘다가도, 걔가 너무 멀리 앞서나가면 내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고 지워지는 것 같은 본능적인 공포. 그 공포가 우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이 드라마의 연출은 그런 찰나의 심리적인 균열을 정말 섬세하고 공들여서 잡아냅니다. 카메라 앵글 하나, 배경에 놓인 소품 하나에도 두 사람의 거리감이 느껴지거든요. 특히 둘이 나란히 걷는 장면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있는 그 좁고도 넓은 공간... 그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처럼 느껴질 때 제 눈물샘이 속수무책으로 터져버렸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절대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의 거리 말이에요.
4. 서른을 넘기고 다시 마주한 '우리'라는 이름의 무게
드라마는 단순히 철없던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우정만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어느덧 훌쩍 성인이 된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그 사이를 메우는 어색함과 그리움, 그리고 세월이 겹겹이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벽을 넘으려는 노력이 정말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펐습니다. 저도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서서 그런지, 이제는 막연히 압니다. 누군가와 '완벽하게' 다시 시작한다는 건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요. 이미 한 번 깨진 그릇은 아무리 공들여 붙여도 가느다란 금이 남듯이, 우리 관계도 상처 입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겠죠.
하지만 <은중과 상연>은 우리에게 조용히 위로를 건넵니다. 그 금이 간 부분조차 우리가 함께 보낸 역사의 일부라고요. 흉터가 남았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뜨겁게 서로를 사랑했고 치열하게 부딪혔다는 훈장 같은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마지막 회를 다 보고 나서 저는 휴대폰을 들고 용기를 내서 민주한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채팅창에 글자를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했죠. 결국 '전송' 버튼은 누르지 못했지만요. "잘 지내?"라는 그 평범한 세 글자가 왜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짧은 말속에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그리움이 너무 꽉 차 있어서 그런 거겠죠.
5. 김고은과 박지현, 연기가 아닌 삶을 보여주다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를 도저히 안 할 수가 없네요. 김고은은 진짜... 말이 안 나옵니다. 그 배우는 어떻게 숨소리 하나, 눈꺼풀의 떨림 하나만으로도 수만 가지 서사를 만들어낼까요? 은중이의 그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정한, 그러면서도 깊은 곳에 상처를 꾹꾹 눌러 담은 그 눈빛은 김고은이 아니면 대체 누가 소화했을까 싶어요. 박지현 배우도 정말 이번에 다시 봤습니다. 전작들에서도 아우라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완전히 캐릭터 그 자체로 살고 있더라고요. 도도하고 화려해서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위태로운 상연이의 이면을 너무나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두 사람이 대사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장면에서도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는 게 화면 너머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작가님이 대본을 기가 막히게 쓴 것도 있겠지만, 이건 두 배우의 영혼이 맞닿은 '케미'가 살린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짜 연기나 연출을 공부하는 분들은 이 드라마를 프레임 단위로 쪼개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정 하나로 감정의 층위를 쌓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최고의 교과서 같거든요.
마무리를 하며: 당신의 마음속에도 '은중'과 '상연'이 살고 있나요?
부족한 제 긴 넋두리를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묻고 싶어요.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름만 들어도 가슴 언저리가 홧홧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고 예뻤던 시절을 온전히 함께 공유했지만 지금은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해진, 하지만 문득문득 삶의 길목마다 불쑥 튀어나와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은중과 상연>은 단순히 여자들의 우정을 예쁘게 포장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겪어왔고, 또 겪게 될 '상실'에 대한 깊은 애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인연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함'에 대해 나직이 읊조리는 이야기입니다. 보는 내내 지독하게 아프고 쓰렸지만, 그 통증 덕분에 제가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임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었어요.
오늘 밤엔 꿈속에서라도 민주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꿈속에서라면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만나서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미안했다고, 사실은 네가 너무 눈부시게 잘나가는 게 무서웠다고, 그래도 내 십 대의 전부였던 널 정말 많이 좋아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여러분도 만약 마음속 한구석에 해결되지 않은 해묵은 감정이나 누군가가 남아있다면, 꼭 이 드라마를 보며 그 감정의 찌꺼기들을 마음껏 쏟아내 보시길 바랍니다. 한바탕 크게 울고 나면, 마음의 무게가 아주 조금은 가벼워질지도 모르니까요. 저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