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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도깨비>의 마법: 왜 우리는 여전히 김신의 비를 기다리는가?

by sesanglog 2025. 12. 22.

넷플릭스_도깨비

어떤 드라마는 단순히 '재미있었다'는 감상을 넘어, 특정 계절의 공기 자체를 통째로 점유해버리곤 합니다. 제게 드라마 <도깨비>가 그렇습니다. 코끝이 찡해지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거나, 창밖으로 이유 없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면, 저는 약속이라도 한 듯 퀘벡의 붉은 단풍잎과 강원도의 시린 메밀밭을 떠올립니다. 벌써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TV 화면 속에서 김신이 읊조리던 시구들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서 첫눈처럼 내려앉습니다.

사실 <도깨비>는 설정만 놓고 보면 참으로 가혹한 이야기입니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살아가야 하는 형벌.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수없이 지켜보며 그 무덤을 하나하나 제 손으로 만들어야 했던 한 남자의 고독. "상이자 벌"이라 했던 신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 남자의 불행을 보며 역설적으로 위로를 받았을까요? 아마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가슴 속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검' 하나쯤은 꽂은 채, 누군가 나타나 그 아픔을 알아봐 주길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1. 불멸이라는 이름의 고독, 그 깊이를 가늠하다

드라마의 주인공 김신(공유 분)은 고려의 무신이었습니다. 주군을 위해 적의 피를 뒤집어쓰며 싸웠으나, 결국 자신이 지키려 했던 주군의 칼날에 스러져간 비운의 영웅이죠. 그가 도깨비로 다시 깨어났을 때, 그것은 신의 축복이 아닌 저주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곧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김신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수백 년 동안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먼 산을 바라보던 그 옆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공유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는 '939년의 고독'이라는 추상적인 설정을 살아있는 실체로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슬플 때 내리는 비는 단순히 기상 현상이 아니라, 신조차 외면한 한 남자의 소리 없는 오열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비 오는 날 유독 이 드라마를 떠올리는 건, 어쩌면 우리 내면의 우울함이 김신의 비와 공명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2. 지은탁, 찬란한 슬픔의 시작이자 끝

그런 김신의 앞에 나타난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은 이 비극적인 서사에 따스한 햇살을 비춥니다. "아저씨, 저 사랑해요?"라고 묻던 열아홉 소녀의 천진함은, 천 년을 살며 굳어버린 김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를 만나 검을 뽑아야만 평안에 이를 수 있는 도깨비와, 그 검을 뽑는 순간 연인을 잃어야 하는 신부의 운명.

이 지독한 아이러니가 <도깨비>를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생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죽음이 나에게로 걸어온다."라는 독백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곧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되는 그 찰나의 순간들. 김고은 배우의 맑은 미소 뒤에 가려진 슬픈 눈망울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느끼는 불안'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도깨비가 캐나다의 어느 언덕에서 은탁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리던 '사랑의 물리학'은, 다시 봐도 가슴이 미어지는 명장면입니다.

3. 저승사자와 써니, 망각이라는 신의 배려 혹은 형벌

메인 커플만큼이나 우리를 아프게 했던 건 저승사자(이동욱 분)와 써니(유인나 분)의 서사였습니다. 전생의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저승사자와, 모든 것을 기억하며 기다려야 했던 여자의 사랑. 작가 김은숙은 이들을 통해 '기억'과 '망각'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기억은 지옥이고, 사랑하는 이에게 망각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사실을요.

찻집에서 망자들에게 차 한 잔을 건네며 이승의 기억을 지워주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영혼에 새겨진다는 것을 써니의 눈물을 통해 보여주었죠. "내 소식 전해 듣지 마요. 우린 다시는 보지 맙시다."라고 말하던 써니의 마지막 인사는, 역설적으로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만나자는 절박한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두 사람이 계단 위에서 스쳐 지나가며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의 힘이 무엇인지 증명했습니다.

4. 삶은 신이 잠시 머물다 가는 선물 같은 시간

드라마 <도깨비>가 종영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도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고, 누구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냅니다. 드라마 속 망자의 찻집을 거쳐 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하루가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갈구하던 '내일'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는 대사처럼, 드라마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인연과 호의가 사실은 신이 보낸 위로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김신이 900년 동안 기다려온 구원이 결국 지은탁이라는 한 사람의 사랑이었듯, 우리 삶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 또한 대단한 기적이 아닌, 옆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손길 한 번일 것입니다.

마치며: 우리 생의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다시금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그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요? 비록 우리 삶에 도깨비 같은 마법은 없을지라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상실에 아파하며, 다시 일어서는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충분히 마법 같은 일이니까요.

오늘 밤, 혹시 창밖에 비가 내린다면 김신의 슬픔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비가 그친 뒤 돋아날 새싹처럼, 여러분의 삶에도 찬란한 첫눈 같은 기적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9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도깨비>는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