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텔레비전을 껐습니다. 화면 속 예서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거든요.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스카이 캐슬>. 처음 이 드라마가 방영됐을 때 세상이 뒤집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드라마를 다시 꺼내 본 제 마음은 그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서늘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여전히,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견고한 '캐슬'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글은 단순한 드라마 리뷰가 아닙니다. 이건 어쩌면 성공이라는 이름의 독사과를 한 입 베어 문 채, 그것이 독인 줄도 모르고 달콤함에 취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자책이자 고백입니다.
1. 화려한 성벽 뒤에 숨겨진 악취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스카이 캐슬'은 참으로 우아합니다. 유럽의 어느 귀족 가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건축물,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 그리고 그 안에서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 하지만 카메라는 그 우아함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가장 먼저 제 마음을 할퀸 건 영재네 가족의 파멸이었습니다. '서울대 의대 합격'이라는 가문의 영광을 거머쥔 순간, 그 집은 축제의 장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어버렸죠. 아들은 부모를 저주하며 떠나고,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그 극단적인 비극.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보면서도 캐슬 안의 사람들은 슬퍼하기보다 '그 집 코디가 누구였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숨이 턱 막혔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으려는 그 잔혹함이, 사실은 우리 안에도 조금씩은 다 자라고 있는 괴물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우리는 과연 영재 엄마의 죽음을 보고 진심으로 애도했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내 자식은 합격해야지'라는 비겁한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2. 한서진, 그녀가 씌워준 '슈룹'은 왜 피로 물들었나
배우 염정아가 연기한 한서진은 이 드라마의 가장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과거를 지우고 완벽한 사모님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그녀를 보며 처음엔 '참 지독하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에서 저는 어떤 처절함을 보았습니다. 그녀에게 자식의 성공은 곧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던 거죠.
한서진은 예서에게 완벽한 우산(슈룹)이 되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비바람으로부터, 세상의 멸시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녀가 씌워준 그 우산은 자식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식의 시야를 가리고 숨을 조이는 감옥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주영(김서형 분)이라는 괴물 같은 코디네이터를 집안에 들인 것도 결국은 한서진의 그 지독한 불안이었습니다.
"어머니,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김주영의 이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계약처럼 들립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적을 올리겠다는 부모들의 욕망을 정확히 꿰뚫어 본 거죠.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제 가슴을 쳤던 건, 예서가 공부하는 그 숨 막히는 1인용 독서실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아이는 성적이 오를수록 인간성을 잃어갔습니다. 성공이라는 독사과를 베어 물기 위해 자신의 영혼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3.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차교수(김병철 분)가 집착했던 피라미드 모형은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관통합니다. "꼭대기에 올라가야만 인간 대접을 받는다"는 그 강박. 그런데 정작 그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던가요? 아니요, 그들은 늘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서로를 헐뜯고 감시합니다.
저는 이 피라미드 철학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사는 구조. 혜나라는 아이의 죽음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배경이 없다는 이유로 캐슬의 아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혜나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 그 자체였습니다. 혜나는 사실 그 피라미드를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균열이었는데, 캐슬은 그 균열을 용납하지 않고 잔인하게 짓밟아버렸습니다.
4. "어머니, 이제 그만 멈추셔야 합니다"
드라마 중반, 이수임(이태란 분)이 캐슬 사람들에게 던지던 날 선 충고들은 사실 시청자인 우리에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드라마 속 엄마들처럼 그녀를 '오지랖 넓은 여자'로 치부하며 외면하진 않았나요?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서울대 합격증이 아니라 엄마와의 따뜻한 밥 한 끼, 그리고 "수고했어, 힘들지?"라는 진심 어린 위로라는 것을요.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불안해집니다. 옆집 아이가 학원을 몇 개 다니는지 체크하고, 성적표 숫자에 일희일비하죠.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그 불안을 먹고 자란 괴물들이 결국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냅니다. 독사과는 베어 무는 순간에는 달콤하지만, 결국 온몸에 독이 퍼져 자신을 잃게 만든다는 사실을요.
5. 글을 마치며: 당신의 '캐슬'은 안녕한가요?
20회가 넘는 긴 여정을 마치고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피라미드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땅을 딛고 설 수 있도록 단단한 자존감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 길이 남들보다 조금 늦어 보일지라도, 혹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를 다그치며 문제집을 들이밀고 있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잠시만 숨을 고르고 아이의 눈을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의 눈에 담긴 건 서울대 의대의 꿈인가요, 아니면 엄마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인가요?
<스카이 캐슬>은 끝났지만, 우리의 현실 속 캐슬은 여전히 공고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성벽에 작은 균열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공이라는 독사과를 내려놓고,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진짜 사람 냄새 나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요.
오늘 밤은 예서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예서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꼭대기가 아니어도 괜찮아. 너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빛나는 존재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