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리뷰 : 사는 게 참 짜다 싶을 때, 옹산 게장 골목이 그리워지는 이유 <동백꽃 필 무렵>

by sesanglog 2025. 12. 25.

동백꽃 필 무렵

요즘 들어 부쩍 마음이 헛헛할 때가 많더라고요. 아침에 눈 뜨는 게 숙제 같고, 사람들과 섞여 지내면서도 문득문득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그런 기분이요. 그럴 때마다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찾아 넷플릭스를 켭니다. 그리고 홀린 듯이 이 드라마를 다시 틀게 되죠. 바로 제 인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입니다.

사실 처음 이 드라마가 나왔을 땐 좀 삐딱하게 봤던 것도 같아요. '에이, 또 뻔한 시골 로맨스겠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1화를 넘기고 나면 어느새 제가 옹산 게장 골목의 한가운데 서서 동백이의 눈치를 보고, 용식이의 사투리에 낄낄거리고 있더라고요. 오늘은 이 투박하고도 따뜻한 드라마가 저에게 건네준 위로들을 두서없이, 하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 적어보려 합니다.

 

1. "아니, 근데 진짜... 동백이가 무슨 죄예요?"

"동백 씨, 남들 보라고 웃지 마요. 기분 좋을 때만 웃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동백 씨는 충분히 빛나요."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하다가 저도 모르게 모니터 대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드라마 초반의 동백이는 진짜 사람 가슴을 퍽퍽하게 만들잖아요. 세상천지에 저렇게 착해 빠진 여자가 있을까 싶고, 저렇게 온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구박하는데 왜 바보같이 실실 웃기만 하나 싶어서요. 속이 터지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죠.

근데 말이죠, 참 이상하죠? 퇴근길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오다 보면, 그 답답했던 동백이 얼굴이 자꾸 제 얼굴 같아서 코끝이 찡해지더라고요. 우리도 사실 그렇잖아요. 어디 가서 큰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늘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술 끝에 매달려 있죠.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삶'이라는 궤도에서 아주 살짝만 어긋나도,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손가락질을 해대니까요.

동백이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술을 파는 식당을 한다는 이유로 옹산의 이방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 묵묵히 웃으며 잔을 닦고 아들 필구를 챙겼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바로 그런, 세상이 그어놓은 금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금 밖에서 떨고 있는 우리에게 "너는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아주 다정한 토닥임이기도 합니다.

 

2. 촌스러운데 이상하게 눈물 나는, 황용식이라는 곰 한 마리

이 드라마의 백미는 역시 '황용식(강하늘 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나요? 전략도 없고, 밀당도 모르고,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냅다 직진만 하는 이 남자. 처음엔 "뭐 저런 캐릭터가 다 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납니다. 눈은 늘 뒤집혀 있고, 사투리는 투박하다 못해 촌스럽기 짝이 없죠. 강하늘 배우가 어찌나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지, 가끔은 정말 저 사람이 배우인가 싶을 정도로 옹산 순경 그 자체더라고요.

근데 신기한 건, 그 무식한(?) 진심이 동백이를 바꾸고,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녹여버린다는 거예요. 남들이 동백이한테 "너는 박복해, 너는 운이 없어"라고 저주 섞인 동정을 퍼부을 때, 용식이는 옆에서 "동백 씨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내가 다 증명해주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게 참...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하더라고요. 누가 나한테도 저렇게 무조건적인 내 편이 되어준다면, 이 험한 세상도 조금은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는 유치한 환상을 갖게 만드는 거죠.

용식이가 동백이에게 건네는 사랑은 거창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닙니다. 뜨끈한 밥 한 그릇, 남들이 떼먹으려고 안달 난 두루치기 값을 대신 받아주는 고집, 그리고 "당신은 기적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일매일 귀가 따갑게 속삭여주는 촌스러운 고백입니다.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결국 세련된 연애 기술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변치 않는 그 온기라는 걸 용식이를 보며 배웠습니다. 용식이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아,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구나" 하는 자존감이 덩달아 차오르는 기분이 듭니다.

 

3. 옹산 아지매들, 그 츤데레 같은 연대의 힘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옹산 아지매들'입니다. 처음엔 어찌나 얄밉던지! 동백이가 새로 가게를 냈다고 텃세란 텃세는 다 부리고, 미혼모라고 뒤에서 수군대고... 솔직히 "저 아줌마들 너무하네, 자기들이 다 해줄 것도 아니면서"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곽덕순 여사님(고두심 분)과 동백이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보는 내내 제 가슴을 졸이게 했죠.

그런데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이 아줌마들이 보여주는 반전이 가관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동백이를 지키기 위해 고무장갑 벗어 던지고 거리로 나서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는 정말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틱틱거려도 속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거죠. "야, 동백아! 너는 우리가 지켜! 누가 감히 우리 동네 동백이를 건드려!"라고 외치는 그 뭉툭한 목소리들이 얼마나 든든하던지요.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평소엔 별로 다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뚝뚝해 보여도, 내가 정말 힘들 때 말없이 반찬 통 하나 건네주는 이웃들. 옹산은 그런 '정'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가야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옆 사람이 넘어지면 일단 일으켜 세우고 등짝 한 대 후려치면서 "똑바로 걸어!"라고 말하며 같이 걸어가는 곳. 그 촌스러운 공동체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건, 아마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만큼 차갑고 외롭기 때문이겠죠.

 

4. 모성애라는 이름의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굴레

드라마는 동백이와 그녀의 엄마 '조정숙(이정은 분)'의 관계를 통해 엄마라는 존재의 무게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말 못 할 사정과, 그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평생을 그리워했던 딸의 애증. 이정은 배우의 그 멍한 듯하면서도 슬픔이 꽉 찬 눈빛을 볼 때마다 제 심장도 같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엄마가 되어 아들 필구를 지키기 위해 고구분투하는 동백이를 보면 "엄마는 원래 다 그래?"라는 질문에 이 드라마가 단호하게 대답하는 것 같아요. "응, 엄마는 원래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괴물이 되고, 기꺼이 바보가 돼."라고요. 필구가 엄마 동백이를 지키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내가 다 때려줄 거야! 엄마는 내가 지켜야 돼!"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진짜 목구멍이 뜨거워져서 혼났습니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등을 밀어주는 아이. 아이는 엄마를 보며 자라고, 엄마는 아이를 보며 하루를 버틴다는 그 평범하지만 지독한 진리. <동백꽃 필 무렵>은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바치는 가장 처절하고도 다정한 헌사 같습니다. 특히 "동백아, 너는 기차 타고 가. 엄마가 뒤따라갈게" 하던 그 대사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먹먹함을 남깁니다.

 

5. 까불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 안의 불안

드라마를 관통하는 스릴러 요소인 '까불이'의 정체. 처음엔 그게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는데, 사실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까불이는 어쩌면 우리 일상에 아주 깊숙이 숨어 있는 '불안'이나 '편견', 그리고 '무관심' 그 자체일지도 모르니까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비웃고, 내가 불행해지기를 기다리는 그 차가운 시선들이 바로 우리 삶의 까불이가 아닐까요?

하지만 동백이는 결국 그 까불이의 손아귀에서 멋지게 벗어납니다. 혼자가 아니라, 용식이가 있었고, 옹산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당당해지기로 한 본인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없다, 우리들의 합작일 뿐이다"라는 마지막 대사가 유독 길게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맞아요, 기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합작품'인 거죠. 옹산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까불이를 찾아내고 동백이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작은 방패가 되어준다면 우리 안의 까불이(불안)도 결국은 힘을 잃지 않을까요?

 

6. 마치며: 당신의 동백꽃은 언제 필까요?

글을 쓰다 보니 다시 옹산의 그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뜨끈한 두루치기 냄새가 그리워지네요. 혹시 지금 삶이 너무 고달파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아니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어 발걸음이 무거우신가요? "나는 왜 이렇게 박복할까"라며 남몰래 한숨을 내뱉고 계시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오늘 밤엔 <동백꽃 필 무렵>을 다시 한번 꺼내 보세요. 드라마 속 동백이가 결국 추운 겨울을 견디고 흐드러지게 피어났듯이, 당신이라는 꽃도 지금은 비록 찬바람을 맞고 있을지언정 분명히 필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용식이가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처럼, "당신은 충분히 귀하고, 충분히 기적 같은 사람"이라는 걸 절대, 절대 잊지 마세요.

아, 그리고 보실 때는 꼭 휴지 한 곽 옆에 챙겨두시고요! 옹산 아줌마들 사투리에 웃다가, 동백이의 서러운 눈물에 같이 울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의 응어리들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드실 거예요. 자,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화사한 동백꽃이 활짝 피어날 그날까지, 다들 기운 냅시다! 당신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