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독하게 아름다운 낭만의 시대, 그 끝에 선 이들의 기록
어떤 드라마는 종영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짙은 향기를 남깁니다. 제게는 <미스터 션샤인>이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2018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매 주말 저녁 우리를 구한말의 뜨거운 불꽃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 드라마는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 보아도 여전히 그 온도가 식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넷플릭스라는 거대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을 때, 이 작품이 가진 압도적인 영상미에 감탄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인 우리에게 이 드라마는 단순한 '볼거리' 그 이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혹은 너무 아파서 외면하고 싶었던 구한말의 역사를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가장 날카롭게 찔러왔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세 단어, 건(Gun), 글로리(Glory), 새드엔딩(Sad Ending)을 통해 이 지독하고도 아름다웠던 이야기를 다시금 깊게 복기해보고자 합니다.
1. 건(Gun): 살기 위해 잡은 총, 지키기 위해 겨눈 총
드라마의 시작은 처절할 정도로 비극적입니다. 조선의 가장 낮은 곳, 노비로 태어나 부모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맨발로 미국 본토까지 흘러 들어간 소년 유진 초이(이병헌 분). 그에게 총(Gun)은 복수이자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조국 조선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며 미국인 이방인이 되어 돌아온 유진에게, 조선은 그저 '개화가 덜 된, 미개하고 힘없는 나라'일 뿐이었죠. 이방인의 눈으로 본 조선은 구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임무를 마치고 떠나야 할 타국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조선 최고의 명문가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에게 총은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담장 안에서 자수나 놓고 공맹의 가르침을 읊으며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그녀였지만, 애신은 화려한 비단 치마 대신 거친 무명옷을 입고 지붕 위를 달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죠. 누군가 싸우지 않으면 조국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요.
유진과 애신, 이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칠흑 같은 어둠 속,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눴던 그 찰나의 긴장감. 서로의 복면 뒤에 숨겨진 눈빛을 확인한 순간, 두 사람의 운명은 개인의 복수나 안위가 아닌 '저물어가는 나라'라는 거대한 풍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갑니다. 유진은 "조선은 변하고 있소. 누가 먼저 변하느냐의 문제지"라고 냉소적으로 말하지만, 결국 애신의 "나는 꽃으로 살기보다 불꽃으로 살겠소"라는 결연한 의지에 자신의 전부를 걸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넘어, 서로 다른 세계관이 '조선'이라는 공통의 운명 앞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2. 글로리(Glory): 찰나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비극의 그림자
드라마의 주요 무대인 '글로리 호텔'은 당시 개화기 조선의 모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서구식 드레스를 입고 '가베(커피)'를 마시며 낭만을 논하는 귀족들과 외국인들 사이로, 국권은 한 조각씩 일본에게 잠식당하고 있었죠. 쿠도 히나(김민정 분)가 운영하는 이 화려한 호텔은 겉으로는 번쩍이는 영광(Glory)의 장소였지만, 실상은 온갖 정보가 오가고 비릿한 음모가 판을 치는 전쟁터였습니다.
김은숙 작가는 '글로리'라는 단어를 매우 중의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완용을 모델로 한 친일파들에게 그것은 외세의 힘을 빌려 누리는 '가짜 영광'이었고, 유진과 애신에게는 언젠가 맞이할 조국의 독립이라는 '머나먼 영광'이었습니다. 특히 쿠도 히나라는 인물은 이 글로리 호텔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였고, 자신은 일본인에게 팔려 가야 했던 그녀의 삶. "내 보물 1호는 나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밤마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그녀가 끝내 호텔을 폭파하며 선택한 마지막은, 화려한 호텔 여주인으로서의 영광이 아니라 조선의 한 여인으로서의 자존이었습니다.
또 한 명의 잊을 수 없는 인물, 김희성(변요한 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라며 스스로를 한량이라 칭했던 그는, 사실 자신의 조부와 부모가 저지른 업보를 누구보다 무겁게 짊어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총 대신 펜을 잡았습니다. 기록되지 못할 의병들의 이름을 신문에 적어 넣고, 역사의 진실을 남기려 했던 그의 싸움은 그 어떤 칼날보다 예리했습니다. 그가 말했던 '무용한 것들'—달, 별, 꽃, 웃음—을 지키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가장 유용한 불꽃으로 태웠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하며 지었던 그 미소는, 그가 평생 찾아 헤맸던 진짜 '글로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3. 새드엔딩(Sad Ending): 예견된 비극, 그러나 승리한 역사
역사가 스포일러이기에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음을요. 1900년대 초반의 조선은 이미 멸망의 궤도에 올라와 있었고, 수많은 이름 없는 의병은 죽음으로 역사를 써 내려가야 했으니까요. 드라마는 이를 대놓고 '새드엔딩'이라 예고하면서도, 그 절망 안에서 가장 고귀한 승리를 건져 올립니다.
구동매(유연석 분)의 서사는 다시 봐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 취급도 못 받던 그가 일본 낭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는 세상을 증오하는 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괴물을 움직인 것은 오직 한 여인, 애신을 향한 지독한 연모였습니다. "제가 다 망쳐놓았군요"라며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던 그의 손길, 그리고 최후의 순간 유채꽃밭에서 칼을 맞으며 그녀를 떠올리던 눈빛. 그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나, 신분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간으로서 사랑을 지켜낸 승리자였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기차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