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 <대행사>를 보기 전까지 저는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에만 급급한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싣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영혼 없는 보고서를 쓰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그런 무채색의 삶 말이죠. 그러다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이보영 씨의 서늘한 눈빛이 담긴 썸네일을 봤고, 그날 밤 저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전략이 없으면 광고가 아니라 공해다."라는 고아인의 그 한마디가 마치 제 인생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처럼 느껴졌거든요.
처음 드라마를 시작했을 땐, 솔직히 고아인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독할 수 있을까? 친구도 없고, 가족도 등지고, 오직 성공만을 위해 약을 한 움큼씩 삼키며 버티는 저 삶이 과연 행복할까? 그런데 말이죠, 회차를 거듭할수록 제 안의 밑바닥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거부감이 아니라 일종의 '동질감'이었어요. 우리 모두는 사실 각자의 전쟁터에서 고아인처럼 살고 있잖아요. 다만 그녀처럼 소리 내어 싸우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고 있을 뿐이죠.
1. 광고판 뒤에 숨겨진 직장인의 처절한 자화상
고아인이 VC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되기 위해 벌이는 그 처절한 수 싸움들을 보면서, 저는 광고 대행사라는 공간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백으로 라인을 타고, 누군가는 실력으로 승부하려 하지만 결국 정치는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최창수 상무가 고아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비열한 짓을 골라 할 때마다 저는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드라마 속 악역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어요. 내 커리어를 가로막았던, 혹은 나를 소모품으로만 대했던 그 누군가가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고아인의 '독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정의했어요. 스펙도 없고 배경도 없는 고아인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캠페인은 바로 '압도적인 실력'이었습니다. 남들이 "여자가 무슨", "지방대 출신이 감히"라고 수군거릴 때, 그녀는 그 편견을 비웃듯 보란 듯이 숫자로 증명해냈죠.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어떻게 광고하고 있는가?'
2. 타인의 욕망인가, 나의 갈망인가
혹시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정작 내 인생의 주인권은 남에게 내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고아인은 말합니다. "남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지 마라." 이 대사가 제 뒤통수를 때리더군요. 부모님이 원하는 삶, 회사가 원하는 모습,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준에 맞추느라 정작 내가 어떤 캠페인을 하고 싶은지는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고아인이 그 화려한 광고판 뒤에서 공황장애와 싸우며 외롭게 서 있는 모습은, 어쩌면 성공이라는 화려한 껍데기를 쫓는 우리 시대 모든 이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 강한나라는 캐릭터를 빼놓을 수 없죠. 재벌 3세, 철부지처럼 보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터득해 나갑니다. 고아인과 강한나가 서로를 이용하면서도 묘하게 연대하는 그 관계성! 저는 이 부분이 이 드라마의 백미라고 봅니다. 단순히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를 탈피해서,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고 각자의 목표를 위해 전략적 파트너가 되는 모습은 정말 짜릿했습니다. "우리는 동료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예요"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손을 들어주는 그 쿨한 관계가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진짜 리더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3.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 독립된 자아로의 길
드라마 중반부, 고아인이 엄마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는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성공에 집착했던 이유, 잠을 자지 못하고 약에 의존했던 그 근원적인 외로움이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상처에서 기인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고아인은 더 이상 '독한 상사'가 아니라 그냥 '안아주고 싶은 아이'로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상처가 하나씩 있잖아요.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더 화려한 옷을 입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쓰는 거죠. 하지만 드라마는 말합니다. 결국 그 상처를 치유하는 건 더 큰 성공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라고요.
<대행사>의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저는 제 방 책상 앞에 붙여둔 포스트잇을 바꿨습니다. "열심히 하자" 대신 "어떤 캠페인을 할 것인가?"라고요. 내 인생이 60초짜리 광고라면,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하고 싶은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승진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고아인이 결국 자기만의 대행사를 차려 독립했듯이 나 또한 세상의 기준에서 독립해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본 분들이라면 아마 제 이 장황한 수다를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건 단순히 광고 업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닙니다. 정글 같은 직장 생활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남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는 브랜드'를 어떻게 사랑하고 키워나갈 것인지에 대한 아주 치열한 보고서니까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캠페인을 진행 중이신가요? 혹시 타인의 시선이라는 광고주에게 휘둘려 '허위 광고'를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고아인이 던진 그 날카로운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오늘 하루는 여러분 자신이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 되는 캠페인을 시작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공이 행복을 담보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를 지키는 실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그 하나만큼은 <대행사>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 겁니다.
아, 그리고 이보영 배우의 그 미친 듯한 연기력과 칼 같은 수트핏... 이건 정말 말해 뭐합니까. 눈도 즐겁고 마음도 뜨거워지는 이런 명작, 아직 안 보셨다면 꼭 이번 주말에 몰아보시길 추천드려요. 단, 월요일 출근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부작용은 책임 못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