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드라마 리뷰] 낡은 무전기가 던진 묵직한 질문, <시그널>을 다시 정주행하며
가끔 밤공기가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 유난히 생각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치익- 치익- 하는 노이즈 섞인 소음 너머로 "박해영 경위님, 거기도 그럽니까?"라고 묻던 이재한 형사의 그 투박하면서도 절실한 목소리 말이죠. 2016년, tvN에서 처음 이 드라마를 만났을 때의 전율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수많은 신작이 쏟아져 나오지만, 결국 제가 다시 돌아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시그널>이었습니다.
단순히 범인을 잡는 쾌감을 주는 수사물은 많습니다. 하지만 <시그널>처럼 시청자의 심장을 후벼파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정의'의 가치를 이토록 처절하게 증명해낸 작품이 또 있었을까요? 오늘은 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 한국 장르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쓴 이 '마스터피스'에 대해 아주 깊고 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2,000자가 넘는 이 긴 글이 끝날 때쯤, 여러분도 다시 한번 무전기를 켜고 싶은 마음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1. 판타지가 아닌, '간절함'이 만든 연결고리
사실 '타임슬립'이나 '과거와의 통신'은 장르물에서 이제는 식상할 법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시그널>에서 이 무전기는 단순한 판타지적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만들어낸 기적에 가깝습니다. 배터리조차 없는 낡은 무전기가 밤 11시 23분에만 울린다는 설정은, 어쩌면 우리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가장 깨어있어야 할 시간, 혹은 가장 깊은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박해영(이제훈 분)은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을 불신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목격한 친구의 납치 사건, 그리고 무능했던 경찰의 대응이 그를 냉소적인 프로파일러로 만들었죠. 그런 그가 과거의 이재한 형사(조진웅 분)와 연결되면서 겪는 변화는 드라마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입니다. "과거는 바뀔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요." 이 대사는 극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며, 무전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바로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2.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어른', 이재한 형사
조진웅 배우가 연기한 이재한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면 저절로 가슴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그는 세련된 형사도, 천재적인 수사관도 아닙니다. 곰처럼 둔해 보이고,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으며, 권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무식하리만큼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이재한에게 열광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런 '진짜 어른'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고, 돈과 배경 앞에서 작아지지 않으며, 오로지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자신의 안위까지 내던지는 모습. 이재한이 무전기를 통해 박해영에게 묻는 질문들—"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짓거리를 해도 잘 먹고 잘 삽니까?"는 화면 밖 우리들에게 던지는 비수가 되어 꽂힙니다. 이재한의 눈물은 정의가 패배한 시대에 대한 통곡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보겠다는 결연한 의지였습니다. 그가 극 중 영화관에서 홀로 오열하던 장면은 제 인생 최고의 명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3. 15년의 시간을 견딘 집념, 차수현이라는 이름의 무게
김혜수 배우가 연기한 차수현을 빼놓고 <시그널>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어리숙했던 '점박이' 신입 순경이 냉철한 장기미제 전담팀의 팀장이 되기까지, 그 15년이라는 세월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기도 했고, 미안함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찾아야 한다'는 형사로서의 집념이었습니다. 시신을 마주할 때마다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으며 범인을 추적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인간이 고통을 통해 얼마나 단단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합니다.
특히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연출되는 차수현의 변화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김혜수라는 대배우가 보여주는 섬세한 감정선은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수사물에 깊은 서정성을 부여합니다. 그녀에게 무전기는 그리운 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인 동시에, 잊고 싶었던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야 하는 잔인한 매개체이기도 하죠. 그녀의 집념이 있었기에 박해영과 이재한의 공조는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4. 공소시효는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웰메이드의 디테일
<시그널>이 위대한 이유는 실제 사건들을 모티브로 하여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고, 동시에 법과 제도의 허점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등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들은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로 소모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어가는 범인을 눈앞에 두고 단 1초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긴박한 연출은 숨이 막힐 정도였죠.
또한 김원석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독보적입니다. 과거 장면에서는 화면 비율을 4:3으로 조정하고 특유의 거친 질감을 살려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시대를 구분하고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김은희 작가의 치밀한 대본은 말할 것도 없지요. 복선 하나, 대사 한 마디가 16화 마지막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장르물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왜 그녀에게 붙었는지 완벽하게 증명한 작품입니다.
5. 무전은 끝나지 않았다, 시즌 2를 기다리는 마음
드라마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났습니다.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결말이 가장 <시그널>다웠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가야 하는 과정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박해영과 차수현이 이재한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그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있을 '이재한들'을 응원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시그널>을 다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뎌진 우리의 정의감을 다시 날카롭게 벼리고,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일깨우는 의식과도 같습니다. 아직 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셨다면, 혹은 보았더라도 가물가물하시다면 오늘 밤 다시 한번 무전기의 주파수를 맞춰보시는 건 어떨까요? "죄를 지었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게 만드는 드라마, <시그널>이었습니다.
"과거는 바뀔 수 있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 드라마 <시그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