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늘한 계절, 다시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어떤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숫자로 기록되지만, 어떤 드라마는 누군가의 가슴에 생긴 흉터 위에 돋아난 새살로 남습니다. 저에게 <나의 아저씨>는 후자입니다.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퇴근길 사람들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저녁이면, 저는 어김없이 이 드라마의 첫 장면을 떠올립니다. 지옥 같은 만원 지하철 속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박동훈 부장의 뒷모습 말이죠.
사실 작년 말, 우리는 너무나 황망하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이선균을 떠나보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이 드라마를 다시 켤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에서 그가 내뱉는 한숨이, 그가 짓는 쓸쓸한 미소가 연기가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 무렵 깨달았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박동훈이라는 인물은,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유산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는 슬픔을 넘어, 그가 남긴 위로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따라가 보려 합니다.
2. 건물의 균열보다 아팠던 마음의 균열을 견디던 남자
드라마 속 박동훈의 직업은 건축구조기술사입니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전을 진단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찾아내 보수하는 일을 하죠. 참 지독한 역설입니다. 정작 본인의 인생은 쩍쩍 금이 가고 있는데, 남들이 사는 건물의 안녕만을 걱정해야 하는 그의 삶이 말입니다.
그는 잘나가는 변호사 아내를 두었고, 대기업 부장이라는 번듯한 타이틀도 가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중년 남성의 표본 같지만, 그의 내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외도를 눈치채고도 혼자 삭여야 했고, 직장에서는 대학 후배였던 도준영 밑에서 자존심을 깎아가며 버텼습니다. 백수 형과 실패한 영화감독 동생, 그리고 홀어머니의 생계까지 짊어진 그의 어깨는 한 번도 가벼워 본 적이 없습니다.
이선균 배우는 이 '성실한 무기징역수' 같은 박동훈을 연기하며 결코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지친 퇴근길의 터벅거리는 구두 소리, 소주 한 잔을 삼키고 내뱉는 깊은 갈증의 소리,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던 그 낮은 저음의 울림들. 오직 인간만이 가진 그 '결'의 연기가 우리를 화면 앞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는 박동훈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박동훈 그 자체가 되어 우리 곁을 걸어주었습니다.
3.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울리는 주문
<나의 아저씨>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사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아니야"입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울렸을까요? 그것은 박동훈이 이 말을 내뱉는 상황이 결코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안(이지은 분)이 자신의 도청 사실을 고백했을 때, 자신의 치부가 세상에 다 드러났을 때,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순간에도 동훈은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배우 이선균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이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 '생존의 주문' 같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늘 신중했고, 그 울림에는 단단한 무게감이 있었습니다. 그가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로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은 기이한 안도가 찾아왔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이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삽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 내가 겪은 불행이 사실은 별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 이선균은 박동훈을 통해 우리 모두의 '어른'이 되어주었습니다.
4. 사랑보다 위대했던 연대, 지안과 동훈의 낯선 풍경
이 드라마의 백미는 단연 박동훈과 이지안의 관계입니다. 초반에는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의 로맨스가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편협한 시각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얄팍한 단어로 가둘 수 없는, 인간 대 인간의 처절한 '연대'였습니다.
이지안은 동훈의 삶을 도청하며 그의 숨소리와 한숨 소리를 통해 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가장 추한 모습까지도 소리로 공유하게 된 지안은 역설적이게도 동훈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됩니다. 동훈 역시 지안이 자신을 파멸시키려 했던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슬프다"며 그녀의 상처를 먼저 보듬습니다.
이선균 배우의 연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그가 지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습니다. 거기엔 성적인 긴장감이나 소유욕 대신, 동질감을 느끼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존중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지은(아이유)의 서늘한 연기와 이선균의 따뜻한 연기가 부딪히며 만들어낸 시너지는, 드라마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관계의 정의'를 내려주었습니다.
5. 상계동의 소란함 속에 숨겨진 삶의 비린내와 온기
박동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후계동' 사람들입니다. 상훈과 기훈, 그리고 정희네 술집에 모여드는 동네 친구들. 이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잣대로 보면 '실패자'들입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업에 망하고,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해 방황하는 군상들이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들을 불쌍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소란스러운 술자리를 통해 "인생 좀 망가져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선균은 이 시끌벅적한 에너지 속에서 늘 한 발짝 뒤에 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동훈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형들의 철없는 행동에 헛웃음을 짓고, 동생의 욱하는 성질을 받아내면서도 그들과 함께 걷는 밤길을 소중히 여겼던 박동훈.
그가 친구들과 함께 동네 어귀를 걸어갈 때 들리던 그 발자국 소리들이 기억납니다. 혼자 걸으면 처량한 소리지만, 여럿이 걸으면 든든한 합주가 되던 그 소리들. 배우 이선균은 박동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혼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도, '함께'라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6. 맺음말 : 이제는 그가 편안함에 이르렀기를
드라마의 마지막 회, 박동훈은 마침내 임원이 되고 지안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재회한 카페에서 동훈은 묻습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지안은 환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가장 완벽한 치유의 엔딩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밖 현실의 시간은 가혹하게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박동훈 부장의 새로운 웃음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가 남긴 16부작의 긴 여정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살아갈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요. 그가 연기하며 흘렸던 눈물과 그가 뱉었던 진심 어린 대사들은 공중에 흩어지지 않고 우리 가슴 속에 단단한 주춧돌로 남았습니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가장 따뜻한 위로인 박동훈은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버거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밤, 저는 다시 <나의 아저씨>를 켤 것입니다. 고마웠습니다, 이선균 배우님. 당신 덕분에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덜 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