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강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가 주는 특유의 피로감이 있거든요. 누군가에게는 성공의 상징이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입성해야 할 기회의 땅이라지만, 저 같은 평범한 직장인에게 강남은 그저 퇴근길 꽉 막힌 테헤란로의 빨간 브레이크 등 같은 피로한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디즈니플러스에서 정주행한 <강남 비-사이드>를 보면서, 매일 보던 그 빨간 불빛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성공을 향한 열망의 빛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흘리고 있는 핏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오싹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며칠 밤을 설쳐가며 이 드라마의 끝을 확인한 뒤, 제 마음속에 남은 건 통쾌함보다는 지독한 잔상이었습니다.
1. 뻔한 마약 범죄물? 아니, 이건 '악취'에 대한 이야기
처음 1화를 틀었을 때는 사실 반신반의했습니다. “또 강남이야? 또 마약이고, 또 부패한 경찰이야?” 하는 마음이 컸죠. 한국 장르물에서 강남은 이미 사골국보다 더 진하게 우려먹어서 이제는 영양가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소재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시작부터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세련된 영상미로 포장하기보다는, 그 밑바닥에 깔린 지독한 ‘악취’를 시청자의 코끝까지 강제로 배달하려는 느낌이 강했달까요. 드라마는 실종된 클럽 에이스 ‘재희’를 찾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그 추적의 끝에서 마주하는 건 범인이 누구냐는 단순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이 도시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망가졌을까?” 하는 근원적인 회의감이죠.
화려한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너머로 들리는 소리 없는 비명들, 그리고 그걸 돈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손길로 너무나 당연하게 덮어버리는 시스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입안이 써서 자꾸만 시원한 탄산수를 들이켜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 조우진과 지창욱,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주는 기묘한 위로
이 드라마를 강력하게 지탱하는 두 축, 강동우(조우진)와 윤길호(지창욱)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기름과 물 같으면서도, 결국은 서로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동질감을 보여줍니다.
조우진 배우가 연기한 강동우 형사는 참 미련할 정도로 고지식합니다.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고 가족과 멀어지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길을 절대 굽히지 않죠. 요즘처럼 '영리한 타협'이 미덕인 세상에서 그의 뒷모습은 참 외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울컥했습니다. 우리가 이 각박한 사회에서 잃어버린 ‘진짜 어른의 얼굴’을 그에게서 봤거든요.
반면, 지창욱 배우의 변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윤길호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그 자체예요. 얼굴의 흉터보다 더 아파 보이는 건 그의 공허한 눈빛이었습니다. 강남의 화려한 클럽 뒷골목을 지배하는 브로커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 그곳을 혐오하고 탈출하고 싶어 하는 소외된 영혼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지창욱이 보여주는 액션은 화려한 기술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 제발 나를 좀 봐달라고, 여기서 나를 꺼내달라고 외치는 처절한 비명 같았습니다. 지창욱이라는 배우가 이렇게까지 퇴폐적이면서도 처연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3.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B-사이드'의 진짜 진실
드라마 제목인 '비-사이드(B-side)'는 참 중의적이고 아픈 단어입니다. 카세트테이프의 뒷면, 주류에서 밀려난 것들, 혹은 우리가 세금 내고 사는 깨끗한 세상 아래 감추고 싶은 오물 같은 면들.
작품 속 강남은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오는 예쁜 카페나 명품 샵의 거리가 아닙니다. 조명이 닿지 않는 눅눅한 지하 방, 소모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상류층'들의 민낯이 진짜 주인공이죠.
저는 드라마를 보며 자꾸 제 자신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저 아이들을 저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과연 누구일까?" 단순히 악랄한 범죄자들만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A-사이드'의 풍요로움을 간접적으로 누리며, 그 밑바닥의 고통에는 적당히 눈을 감아버린 우리들의 묵인이 만든 괴물은 아닐까요. 하윤경 배우가 연기한 민소진 검사의 흔들리는 눈빛은, 어쩌면 성공과 양심 사이에서 매일 갈등하는 우리 모두의 투영일지도 모릅니다.
4. '사이다' 결말? 글쎄요, 뒷맛은 여전히 씁쓸합니다
물론 장르물답게 권선징악의 흐름이 있긴 합니다. 나쁜 놈들은 대가를 치르고, 사건은 일단락되죠.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현실은 아마 이 드라마보다 수만 배는 더 지독할 것이고, 우리가 잠든 이 순간에도 강남의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는 ‘재희’ 같은 아이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 겁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면을 보고 있느냐"고 말이죠. 화려한 불빛에 눈이 멀어 그 그림자 속에 죽어가는 것들을 모른 척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뼈아픈 일갈이 귓가에 맴돕니다.
마치며: 화려한 야경이 슬퍼 보일 때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신다면 이 드라마는 조금 무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다면, 그리고 배우들의 미친듯한 열연에 흠뻑 젖어보고 싶다면 <강남 비-사이드>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정주행을 마친 오늘 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가끔은 뒤집어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진짜 모습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너무나 아프게 증명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