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작년 한 해,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 대사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로코의 여왕'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 배우의 조합이라니, 당연히 달달한 멜로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웬걸, 멜로는커녕 핏빛보다 진하고 얼음장보다 차가운 복수극이더군요. 저 역시 금요일 밤에 호기심으로 1화를 틀었다가, 정신 차려보니 토요일 오후가 되어있던 '주말 삭제'의 경험을 했습니다.
혹시 아직도 이 드라마를 장바구니에만 넣어두고 계신가요? 혹은 이미 보셨지만 그 복잡 미묘한 인물 관계와 결말의 여운을 다시 한번 곱씹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잘 오셨습니다. 단순한 줄거리 요약을 넘어서, 제가 드라마를 보며 무릎을 탁 쳤던 포인트들과 인물들의 심리를 낱낱이 파헤쳐 드리겠습니다. (※ 주의: 아주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살포시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1. 지옥에서 돌아온 여자, 문동은의 서사
드라마의 초반부는 사실 보기가 좀 힘듭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끄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의 학창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거든요. 박연진 패거리가 고데기로 동은의 팔다리를 지지는 장면은 끔찍함을 넘어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 연출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경찰도, 심지어 엄마조차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 그 처절한 고립감이 화면 밖으로 뚫고 나오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하지만 동은은 죽음 대신 '복수'라는 꿈을 꾸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삶은 오직 박연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채워지죠. 공장에서 일을 하며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바둑을 배우고, 교대에 합격해 마침내 박연진의 딸 예솔이의 담임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이 긴 세월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 증오라는 게 참 슬프면서도, 송혜교 배우의 그 건조하고 푸석한 얼굴이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몰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가해자 5인방, 이 '나쁜 놈'들의 먹이사슬
<더 글로리>가 재미있는 건, 악역들이 단순히 '나쁘다'로 끝나지 않고 자기들끼리도 철저한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 관계성이 복수의 핵심 키가 되거든요.
- 박연진 (임지연 분): 모든 악의 근원. 기상캐스터이자 건설사 사장의 아내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지만, 과거의 죄책감 따위는 1도 없는 인물입니다.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만 있는 줄 알까?"라며 비웃는 장면에선 진짜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어요.
- 전재준 (박성훈 분): 연진의 내연남이자 골프장 오너. 안하무인 그 자체지만 딸 예솔이가 자신의 핏줄임을 알게 되면서 눈이 돌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특이하게 색약이 있다는 설정인데, 이게 나중에 아주 중요한 복선이 되죠.
- 이사라 (김히어라 분): 목사 딸에 화가지만 실상은 마약 중독자. 약에 취해 그림을 그리고 환각을 보는 그녀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예술적인 느낌을 줍니다.
- 최혜정 & 손명오: 이 무리의 최하위 계급입니다. 혜정은 스튜어디스로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늘 연진과 사라에게 무시당하고, 명오는 이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죠. 동은은 바로 이 균열, 즉 '내부의 열등감'을 파고듭니다. 이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릅니다.
3. 망나니와 이모님, 동은의 든든한 아군들
복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더군요. 동은의 곁에는 매력적인 조력자들이 있습니다. 먼저 주여정 (이도현 분). 병원장 아들에 잘생긴 성형외과 의사지만, 그 역시 아버지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트라우마로 속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인물입니다. 동은의 온몸에 난 흉터를 보고 그가 "할게요, 망나니. 칼춤 출게요"라고 말하는 장면, 기억하시나요? 로맨틱한 고백이 아니라 살의를 담은 맹세라 더 심장이 뛰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이모님', 강현남 (염혜란 분). 가정폭력 피해자인 그녀는 남편을 죽여주는 대가로 동은의 스파이가 됩니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그녀가 점점 첩보 활동(?)에 재미를 느끼고, 동은과 묘한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은 이 어두운 드라마의 유일한 숨구멍이었습니다.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는 대사에서 울다가 웃다가 했네요.
4. '나이스한 개새끼', 하도영의 딜레마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는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 (정성일 분)이었습니다. 작가님이 '나이스한 개새끼'라고 표현했다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이에요. 젠틀하고 매너 있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급 나누기와 차가움이 존재하죠.
그는 동은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기원(바둑 두는 곳)에서 그녀에게 서서히 빠져듭니다. 불륜이라기보다는 지적인 끌림에 가까워 보였어요. 결국 아내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습니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차갑게 가라앉히는 그의 연기가 드라마의 품격을 높여줬다고 생각해요.
5. 결말 해석: 완벽한 복수, 그 후의 폐허
결국 복수는 성공하냐고요? 네, 아주 처절하고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동은이 직접 칼을 휘두르는 방식이 아니라 더 좋았습니다. 동은은 그저 판을 깔아줬을 뿐, 가해자들은 서로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자멸합니다.
손명오는 죽고, 혜정은 사라의 비녀에 목이 찔려 목소리를 잃습니다. 사라는 살인미수와 마약 투약 혐의로 감옥에 가고, 재준은 눈을 다친 채 시멘트 반죽에 파묻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죠. (이때 하도영이 관여했다는 암시가 소름 돋았어요.)
그리고 박연진. 그녀는 감옥에 갇혀 모든 것을 잃습니다. 남편도, 딸도, 영광도 사라진 채 좁은 감방 안에서 날씨 예보를 흉내 내며 미쳐가는 그녀의 모습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처럼 보였습니다. 동은이 원했던 "너의 세상이 온통 나로 가득 차는 것"이 실현된 셈이죠.
마지막 장면에서 동은과 여정은 교도소로 향합니다. 여정의 복수를 돕기 위해서요. 복수가 끝난 뒤 동은이 행복해졌을까? 라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복수는 끝났지만 흉터는 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미래(비록 그것이 또 다른 복수일지라도)를 향해 걸어간다는 점에서 희망을 봅니다.
6. 총평: 왜 우리는 '더 글로리'에 열광했나
<더 글로리>는 단순한 사이다 복수극이 아닙니다. 학교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피해자의 연대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가해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모래성처럼 약한지를 보여줍니다. 김은숙 작가의 말맛 나는 대사들은 여전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구멍이 없었으며, 안길호 감독의 연출은 세련됐습니다.
아직도 정주행을 고민 중이시라면, 이번 주말엔 꼭 시작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단, 한 번 켜면 멈출 수 없으니 간식은 넉넉히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문동은의 차갑고도 뜨거운 계절을 함께 걷다 보면, 여러분도 어느새 "멋지다, 연진아!"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